뉴욕 한복판에서 성공을 꿈꾸며 치열하게 커리어를 쌓아가던 어느 날, 각별한 사이였던 형이 갑자기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겪는다. 2008년 가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세계 3대 미술관’이라 불리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이 되어 그곳에 있는 300만 점의 예술 작품을 지키게 된다. 2018년, 10년간 근무했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떠나 뉴욕 도보 여행 가이드로 일하며 미술관에서 보낸 시간을 회고한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All the Beauty in the World)』를 집필했다.
출판 : 웅진 지식 하우스 / 저자 : 패트릭 브링리
인상깊은 문장 필사 ▶
다소 불안정할지언정 수줍어 하지 않고 연주했다.
예술가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물려 받았다..
완전히 새로운 분위기가 난데 없이 펼쳐진다.
우리 앞으로 홀연히 나타났다가 뒤로는 소리 없이 사라졌고 새로운 각도에서 보면 처음 온 방처럼 낯설었다.
소용돌이 같았던 그날의 기억
그 그림의 아름다움은 언어적인 것이 아니라 물감과도 같이 과묵하고 직접적이며 물체적이어서 생각으로 번역하는 것조차 거부하는 듯했다.
가끔 친숙한 환경 그 자체에 장대함과 성스러움이 들어 있다는 느낌이 들곤 하는데 쥐죽은 듯 고요한 아침이면 떠올리게 되는 바로 그 느낌이기도 했다.
영화를 보다 잠이 들었는데 다 끝내지 않은 비디오를 누군가가 돌려줘버린 느낌이야.,
위대한 그림은 거대한 바위처럼 보일 때가 있다.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무무모하고 직접적이며 가슴을 저미는 바위 같은 현실 말이다.
나무의 뿌리는 그 나무에 가지만큼 뻗어 나간다고들 한다.
예술은 어느 주제에 관해 몇 가지 요점을 말하는 것이 대단하게 여겨지는 세상을 경멸하는 것처럼 보인다. 요점이야말로 예술이 절대 내놓지 않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말로 단번에 요약하기에 너무 거대한 동시에 아주 내밀한 것을 다루는 경우가 많고 오히려 침묵을 지킴으로써 그런 것들에 관해 이야기 한다
이집트인들은 시간에 대해 우리와는 다른 관념을 갖고 있다. 네해 (neheh. 수백만 년간)이라고 불렀고 그것에 본질은 화살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원과 같은 순환이었다. ,
해가 뜨고 지고 또 뜬다. 나일강은 범람하고 물러났다가 또다시 범람한다.
새로 태어난 이들을 성숙과 숙성을 겪게 해 죽음으로 안내한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흐르지만 실제로 변하는 것은 없다.
일상이 절대 끝나지 않고 다른 어떤 것도 종결되지 않을때 어떤 느낌이 들었을지를 마음속 깊숙히 감각한다.
나는 어디로도 가지 않아도 되는 지금이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단순 신입 이상의 직급으로 채용되었기에 나는 마치 빅 리그로 수직상승할 공식 허가를 받은 느낌이었다.
이 유리 문과 황금빛 로고가 엄정함을 상징하고 있었다.
대학이 마치 학생들의 손에 쥐어진 고무찰흙 같은 놀이터였다면 이곳은 창밖의 탑처럼 상징적이고 완고한 기관이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주무르는 것이 아니라 이곳이 나의 틀이이 될 것이다.
그런 건 진짜 내 모습이 아니라 조명빨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
이렇게 뛰어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내가 잘하고 있다는 거야. 나는 중요하고 존재감 있는 자리에 명함을 지니고 있어.
달갑지 않은 역사를 직시하는 데 거의 3년이 걸렸다. 내가 만약 덜 대단한 일을 하고 있었더라면 그동안 틈틈히 내 생각들을 흐릿하게나마 적어두었을 테고 영감을 주는 주제가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과감히 도전해 글을 써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리어 이런 빅리그였기에 내 생각에 스스로 족쇄를 채우고 야망은 이상하리만치 줄어들었다.
스스로가 아닌 목소리를 사용하고 내 것이 아닌 권위를 주장하고 정말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 의견들을 피력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관습에 따라 책상에서 책을 펼 수도 머리를 식히는 산책을 할 수도 없었다. 나는 모두가 그러듯 인터넷을 뒤적이고 책을 읽지 않는 법을 배우면서 시간을 허비했다. 점점 진흙탕 속으로 가라앉혀졌다.
세상의 쳇바퀴에서 빠져나와 내가 가능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넓고 더 깊고 내 의견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허클 베리핀, 그러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는 걸 느꼈다.
'곽희는 풍경화가 일상세계의 굴레와 족쇄로부터 두루미의 비행과 원숭이의 울음소리가 우리의 가까운 벗이 되는 곳으로 도피할 수 있게 한다. '는 글을 남겼다.
동료나 관람객들과 나눈 짧은 소통에서 찾기 시작한 의미들은 나를 놀라게 한다. 부탁을 하고 답을 하고 감사인사를 건네고 환영의 뜻을 전하고 그 모든 소통에는 내가 세상의 흐름에 다시 발맞출 수 있도록 돕는 리듬이 깃들어 있다. 비탄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 리듬을 상실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잃고 나면 삶의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한동안 그 구멍 안에 몸을 움추리고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일하면서 웅장한테 상당히 큰 구멍을 하나로 융합시켜 일상의 리듬과는 거리가 먼 곳에 머물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상의 리듬은 다시 찾아왔고 그것은 꽤나 유혹적이었다. 나는 스스로가 영원히 숨을 죽이고 외롭게 살기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만들어지는온기를 깨닫는 것은 내가 자라서 어떤 어른이 될 것인지를 깨닫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삶에서 마주할 대부분의 커다란 도전들은 일상 속에서 맞닥뜨리는 작은 도전들과 다르지 않다. 인내하기 위해 노력하고 친절하기 위해 노력하고 다른 사람들의 특이한 점들을 즐기고 나의 특이한 점을 잘 활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관대하기 위해 노력하고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적어도 인간적이기 위해 노력하는.것
예술을 흡수하는 데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이제는 그러는 대신 예술과 씨름하고 나의 다양한 측면을 모두 동원해서 그의 예술이 던지는 질문에 부딪쳐보면 어떨지 미술관의 발을 들여놓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덤벼볼 만한 가치가 있는 숙제 같아.
예술을 경험하기 위해 사고하는 두뇌를 잠시 멈춰뒀다. 다시 두뇌의 스위치를 켜고 자아를 찾아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몸에서 빠져나온 영혼은 어둠의 우물 같은 저승을 향해 퍼덕였다.
에피파니= 신의 방문 =신의 계시와도 같은 깨달음
예술에서 배우기보다는 예술을 배우려 한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는 모든 정답을 알고 있는 전문가들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이 감히 작품을 파고들어 재량껏 의미를 찾아내는 자리가 아니라고 넘겨짚는다. 매트에서 시간을 보낼수록 나는 이곳에 주된 역할이 미술사 박물관이 아니라는 걸 더욱 확신하게 된다.
하늘 높이 솟았다가 지렁이가 기어다니는 지하 무덤까지 내려가고. 그 둘 사이의 세상에서 사는 것이란 어떤 느낌이고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거의 모든 측면과 맞닿아 있다. 그런 것에 관한 전문가는 있을 수 없다. 나는 우리가 예술이 무엇을 드러내는지 가까이에서 이해하려고 할 때 비로소 예술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 믿는다.
첫 번째는 현실을 인식하도록 세밀하게 조정된 의식의 일부로서 마음 한가한 가운데 자리한 인지 능력이다. 이 거칠것 없는 능력은 우리가 세상에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깨달아 진실이 노골적이고 가깝게 느껴지도록 한다. 하지만 우리는 논리적인 두뇌도 가지고 있다. 이는 우리가 세상에 얼마나 작은 부분밖에 보지 못했는지 그 궁극적인 또는 다면적인 현실을 해독하는데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도구가 얼마나 제한적인지 상기시킨다. 이 관점에서 우주를 바라보면 우주의 진리는 멀리 숨겨져 있는 것처럼 보이고 진실은 불가해한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에겐 두 가지의 시각이 모두 필요하며 심장에 뛰는 것에 맞춰 각각의 시각으로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스스로 보거나 생각하거나 느낄 것 없이 그저 기도문을 암송하는 유령 같은 기계가 되는 편이 더 속편하다. 하지만 때로는 고통과 극도의 피로가 기다리는 극한까지 자신의 지각능력을 밀어붙였다.
30 전후의 나이, 잘난 척은 그만두고 서로에게 기대어 격려를 받기 시작하는 나이, 어쩌면 어려운 나이이기도 하다. 어른이 되기 위한 견습 기간이 끝나고 진정한 의미의 성인기가 다가오고 있다. 다시 한번 그리고 아마 이번에는 진짜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밤이 깊어지고 취기가 오르면서 우리는 덜 어리석고 진지해지며 덜 조심스럽고 더 연약해진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우리끼리는 훌륭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상황에 대해 평가하는 것은 주변을 에워싼 마법을 스스로 깨는 행동이다. 나는 그저 세상에 보내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고요한 하루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뉴욕 한복판에서 성공을 꿈꾸며 치열하게 커리어를 쌓아가던 어느 날, 각별한 사이였던 형이 갑자기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겪는다. 2008년 가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세계 3대 미술관’이라 불리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이 되어 그곳에 있는 300만 점의 예술 작품을 지키게 된다. 2018년, 10년간 근무했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떠나 뉴욕 도보 여행 가이드로 일하며 미술관에서 보낸 시간을 회고한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All the Beauty in the World)』를 집필했다.
출판 : 웅진 지식 하우스 / 저자 : 패트릭 브링리
인상깊은 문장 필사 ▶
다소 불안정할지언정 수줍어 하지 않고 연주했다.
예술가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물려 받았다..
완전히 새로운 분위기가 난데 없이 펼쳐진다.
우리 앞으로 홀연히 나타났다가 뒤로는 소리 없이 사라졌고 새로운 각도에서 보면 처음 온 방처럼 낯설었다.
소용돌이 같았던 그날의 기억
그 그림의 아름다움은 언어적인 것이 아니라 물감과도 같이 과묵하고 직접적이며 물체적이어서 생각으로 번역하는 것조차 거부하는 듯했다.
가끔 친숙한 환경 그 자체에 장대함과 성스러움이 들어 있다는 느낌이 들곤 하는데 쥐죽은 듯 고요한 아침이면 떠올리게 되는 바로 그 느낌이기도 했다.
영화를 보다 잠이 들었는데 다 끝내지 않은 비디오를 누군가가 돌려줘버린 느낌이야.,
위대한 그림은 거대한 바위처럼 보일 때가 있다.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무무모하고 직접적이며 가슴을 저미는 바위 같은 현실 말이다.
나무의 뿌리는 그 나무에 가지만큼 뻗어 나간다고들 한다.
이집트인들은 시간에 대해 우리와는 다른 관념을 갖고 있다. 네해 (neheh. 수백만 년간)이라고 불렀고 그것에 본질은 화살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원과 같은 순환이었다. ,
해가 뜨고 지고 또 뜬다. 나일강은 범람하고 물러났다가 또다시 범람한다.
새로 태어난 이들을 성숙과 숙성을 겪게 해 죽음으로 안내한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흐르지만 실제로 변하는 것은 없다.
일상이 절대 끝나지 않고 다른 어떤 것도 종결되지 않을때 어떤 느낌이 들었을지를 마음속 깊숙히 감각한다.
나는 어디로도 가지 않아도 되는 지금이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단순 신입 이상의 직급으로 채용되었기에 나는 마치 빅 리그로 수직상승할 공식 허가를 받은 느낌이었다.
이 유리 문과 황금빛 로고가 엄정함을 상징하고 있었다.
대학이 마치 학생들의 손에 쥐어진 고무찰흙 같은 놀이터였다면 이곳은 창밖의 탑처럼 상징적이고 완고한 기관이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주무르는 것이 아니라 이곳이 나의 틀이이 될 것이다.
그런 건 진짜 내 모습이 아니라 조명빨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
이렇게 뛰어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내가 잘하고 있다는 거야. 나는 중요하고 존재감 있는 자리에 명함을 지니고 있어.
달갑지 않은 역사를 직시하는 데 거의 3년이 걸렸다. 내가 만약 덜 대단한 일을 하고 있었더라면 그동안 틈틈히 내 생각들을 흐릿하게나마 적어두었을 테고 영감을 주는 주제가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과감히 도전해 글을 써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리어 이런 빅리그였기에 내 생각에 스스로 족쇄를 채우고 야망은 이상하리만치 줄어들었다.
스스로가 아닌 목소리를 사용하고 내 것이 아닌 권위를 주장하고 정말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 의견들을 피력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관습에 따라 책상에서 책을 펼 수도 머리를 식히는 산책을 할 수도 없었다. 나는 모두가 그러듯 인터넷을 뒤적이고 책을 읽지 않는 법을 배우면서 시간을 허비했다. 점점 진흙탕 속으로 가라앉혀졌다.
세상의 쳇바퀴에서 빠져나와 내가 가능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넓고 더 깊고 내 의견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허클 베리핀, 그러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는 걸 느꼈다.
'곽희는 풍경화가 일상세계의 굴레와 족쇄로부터 두루미의 비행과 원숭이의 울음소리가 우리의 가까운 벗이 되는 곳으로 도피할 수 있게 한다. '는 글을 남겼다.
동료나 관람객들과 나눈 짧은 소통에서 찾기 시작한 의미들은 나를 놀라게 한다. 부탁을 하고 답을 하고 감사인사를 건네고 환영의 뜻을 전하고 그 모든 소통에는 내가 세상의 흐름에 다시 발맞출 수 있도록 돕는 리듬이 깃들어 있다. 비탄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 리듬을 상실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잃고 나면 삶의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한동안 그 구멍 안에 몸을 움추리고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일하면서 웅장한테 상당히 큰 구멍을 하나로 융합시켜 일상의 리듬과는 거리가 먼 곳에 머물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상의 리듬은 다시 찾아왔고 그것은 꽤나 유혹적이었다. 나는 스스로가 영원히 숨을 죽이고 외롭게 살기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만들어지는온기를 깨닫는 것은 내가 자라서 어떤 어른이 될 것인지를 깨닫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삶에서 마주할 대부분의 커다란 도전들은 일상 속에서 맞닥뜨리는 작은 도전들과 다르지 않다. 인내하기 위해 노력하고 친절하기 위해 노력하고 다른 사람들의 특이한 점들을 즐기고 나의 특이한 점을 잘 활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관대하기 위해 노력하고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적어도 인간적이기 위해 노력하는.것
예술을 흡수하는 데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이제는 그러는 대신 예술과 씨름하고 나의 다양한 측면을 모두 동원해서 그의 예술이 던지는 질문에 부딪쳐보면 어떨지 미술관의 발을 들여놓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덤벼볼 만한 가치가 있는 숙제 같아.
예술을 경험하기 위해 사고하는 두뇌를 잠시 멈춰뒀다. 다시 두뇌의 스위치를 켜고 자아를 찾아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몸에서 빠져나온 영혼은 어둠의 우물 같은 저승을 향해 퍼덕였다.
에피파니= 신의 방문 =신의 계시와도 같은 깨달음
예술에서 배우기보다는 예술을 배우려 한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는 모든 정답을 알고 있는 전문가들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이 감히 작품을 파고들어 재량껏 의미를 찾아내는 자리가 아니라고 넘겨짚는다. 매트에서 시간을 보낼수록 나는 이곳에 주된 역할이 미술사 박물관이 아니라는 걸 더욱 확신하게 된다.
하늘 높이 솟았다가 지렁이가 기어다니는 지하 무덤까지 내려가고. 그 둘 사이의 세상에서 사는 것이란 어떤 느낌이고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거의 모든 측면과 맞닿아 있다. 그런 것에 관한 전문가는 있을 수 없다. 나는 우리가 예술이 무엇을 드러내는지 가까이에서 이해하려고 할 때 비로소 예술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 믿는다.
첫 번째는 현실을 인식하도록 세밀하게 조정된 의식의 일부로서 마음 한가한 가운데 자리한 인지 능력이다. 이 거칠것 없는 능력은 우리가 세상에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깨달아 진실이 노골적이고 가깝게 느껴지도록 한다. 하지만 우리는 논리적인 두뇌도 가지고 있다. 이는 우리가 세상에 얼마나 작은 부분밖에 보지 못했는지 그 궁극적인 또는 다면적인 현실을 해독하는데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도구가 얼마나 제한적인지 상기시킨다. 이 관점에서 우주를 바라보면 우주의 진리는 멀리 숨겨져 있는 것처럼 보이고 진실은 불가해한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에겐 두 가지의 시각이 모두 필요하며 심장에 뛰는 것에 맞춰 각각의 시각으로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스스로 보거나 생각하거나 느낄 것 없이 그저 기도문을 암송하는 유령 같은 기계가 되는 편이 더 속편하다. 하지만 때로는 고통과 극도의 피로가 기다리는 극한까지 자신의 지각능력을 밀어붙였다.
30 전후의 나이, 잘난 척은 그만두고 서로에게 기대어 격려를 받기 시작하는 나이, 어쩌면 어려운 나이이기도 하다. 어른이 되기 위한 견습 기간이 끝나고 진정한 의미의 성인기가 다가오고 있다. 다시 한번 그리고 아마 이번에는 진짜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밤이 깊어지고 취기가 오르면서 우리는 덜 어리석고 진지해지며 덜 조심스럽고 더 연약해진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우리끼리는 훌륭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상황에 대해 평가하는 것은 주변을 에워싼 마법을 스스로 깨는 행동이다. 나는 그저 세상에 보내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고요한 하루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조각상들은 중학교 댄스 파티의 소년 소녀들처럼 어색하게 떠밀려 붙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