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에 있는 엄마에게 건넌방에 있는 아들이 카톡으로 라면을 끓여 달라고 요청한다. 의자만 돌리면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는 사무실에서도 동료끼리 서로 등을 돌린 채 메신저로 대화한다. 문자로 대화하는 것은 불편한 감정 소모도 덜하고 예의를 갖출 필요도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다. 얼굴을 마주 대하는 대화에 참여하려면 앞뒤 맥락과 분위기 파악을 위해 10분 정도는 잠자코 지켜봐야 하지만 온라인 단톡방에서는 손가락으로 두 번만 스크롤 하면 그동안의 이력을 파악할 수 있다. 문자는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끝내기도 쉽고 상대가 거절해도 불편함이 덜하다. 그래서 그룹단톡방이 콘퍼런스콜보다 부담 없고, 콘퍼런스콜이 영상회의보다 딴짓하기 좋으며, 영상회의가 그나마 대면미팅보다 안전하다.
사실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것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내 표정 관리도 어렵고 상대에게 계속 집중하기도 지루하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잡티를 포토숍으로 감출 수도 없고, 자랑하고 싶은 장면만 편집해 내보낼 수도 없다. 못 알아들었다고 되돌려서 들을 수도 없고, 시간 없다고 재생 속도를 1.25배로 빨리 돌릴 수도 없다. 말실수를 해도 메시지 삭제가 안 되고, 다른 사람에게 한 말을 '복붙'(복사해서 붙여넣기)하기도 어렵다.
실제 세계에서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고 나를 드러낸다는 것은 맨 처음 자전거를 탈 때처럼 위험하고 조심스러운 일이다. 직접 타면서 방향 조절을 익히고 균형 감각을 체득하는 자전거 타기처럼 실습이 필요하다. 안해 버릇 하면 못하게 된다. 용불용설은 신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뇌도 마찬가지다. 뇌 신경 경로가 외부 자극의 경험·학습에 의해 재조직화되는 현상을 뇌신경 가소성이라고 한다. 뉴런 등 뇌세포가 어른이 되고 나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학습이나 환경에 따라 진화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한다. 영국 택시운전사의 해마가 그렇고 음악가의 측두엽이 그렇다. 사용하는 만큼 진화하고 묻혀 두는 만큼 퇴보한다.
요즘 우리 대화를 위한 신경회로망은 퇴화하고 있지 않을까 염려된다. 사과를 대신해 주는 서비스가 있는가 하면 사랑 고백이나 이별 통보를 대행하는 애플리케이션(앱)도 등장했다. 마주하는 대화가 두렵고 어려워서 대신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어폰을 끼고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기가 어렵고 휴대폰을 보고 있는 사람에게 깊은 얘기를 하기가 조심스럽다. 손가락은 빨라졌는데 마주하는 대화는 점점 줄어든다. 웬만하면 전화나 메신저로 간단히 핵심만 처리한다. 본문 없이 제목에 간단히 핵심만 보내는 '제곧내'가 이상하지 않다. '제목이 곧 내용'이라는 그 간단함조차 줄이고 또 줄였다. 점점 간단해지고 점점 압축한다. 만나서조차도 업무 이외 가벼운 대화 이상은 선을 넘지 않는다. 습자지처럼 얇게 빙빙 에둘러 스치다 헤어진다. 심각해지기 싫어하고 직면하기 불편해 한다. 각자 자기 세계를 존중한다는 미명 아래 각자 남의 세계에 관심이 없다.
대화는 호기심과 공감으로부터 시작하는데 그것을 발현할 시간도 투자하지 않고, 마음도 내지 않는다. 대화란 내가 어떤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대를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을 상대가 알 때까지 함께 머무는 것이다. 대화는 시간이 필요하고, 훈련이 필요하다. 또 그만큼 가치가 있다. 대화는 내면에 잠자고 있던 지성에 불을 붙이는 일이다. 대화를 하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야기가 확장되고, 의도하지 않은 생각이 정리된다. 내게 이런 생각이 있었나 하고 스스로도 놀라면서 말을 이어 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대화는 나조차 모르고 있던 내면을 끄집어내는 일이다. 이와 함께 대화는 타인과 연결되는 일이다. 서로의 세계 간 경계를 넘나드는 여행이다. 상대 경험에 무엇이 있고, 상대가 믿는 세계관은 무엇이며, 그것이 나랑 어떻게 다른지 알면서 내 세계관이 명확해진다. 상대가 무엇에 좌절하고 무엇에 힘을 회복하는지 들으면서 내 세계의 그것과도 만난다. 대화는 서로의 세계를 탐험하는 능동형 여행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유튜브에서 일방으로 주는 콘텐츠를 수동 입장에서 훑어보는 게 아니라 내가 방향을 잡을 수도 있고 내가 끌어낼 수도 있다. 내가 손전등을 켜고 감춰진 영역에 빛을 비출 수도 있다. SNS에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시간을 쏟고, 여행을 위해서는 1년 내내 모은 돈을 투자하면서 내 앞에 앉은 사람과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 '기생충'에 보면 “선을 넘는 사람을 내가 제일 싫어하는데… 냄새가 선을 넘지”라는 대사가 나온다. 요즘 우리는 선 넘기를 두려워하고 선을 넘어올까 봐 경계한다. 그러면서 점점 고립되고 외로워진다. 가족은 있는데 가족관계는 없고 친구는 많은데 친구관계는 없다. 형식상 눌러 주는 100명의 '좋아요'는 있는데 시간을 내 터놓고 무엇이 얼마나 왜 좋은지를 대화하는 진정한 감사는 사라지고 있다. 삶은 부딪치면서 깨지고, 그러다 깨닫는 경험의 장이다. 식당에 가서 메뉴만 보고 음식은 먹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세상을 살면서 눈으로 보는 것만 하기엔 삶이 너무 아깝다. 즐거움엔 고통이 동반한다. 어려움과 두려움 뒤에 그만큼 충만함과 기쁨이 숨어 있다. 상대를 훑어보고 구경만 하지 말고 진짜 상대와 만나 진짜 속을 나누자. 삶은 경험을 위한 특권이고, 대화를 경험하기 좋은 기회다.
글쓴이 : 지윤정 윌토피아 대표이사 toptmr@hanmail.net
출처 : http://www.etnews.com/20191018000125
안방에 있는 엄마에게 건넌방에 있는 아들이 카톡으로 라면을 끓여 달라고 요청한다. 의자만 돌리면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는 사무실에서도 동료끼리 서로 등을 돌린 채 메신저로 대화한다. 문자로 대화하는 것은 불편한 감정 소모도 덜하고 예의를 갖출 필요도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다. 얼굴을 마주 대하는 대화에 참여하려면 앞뒤 맥락과 분위기 파악을 위해 10분 정도는 잠자코 지켜봐야 하지만 온라인 단톡방에서는 손가락으로 두 번만 스크롤 하면 그동안의 이력을 파악할 수 있다. 문자는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끝내기도 쉽고 상대가 거절해도 불편함이 덜하다. 그래서 그룹단톡방이 콘퍼런스콜보다 부담 없고, 콘퍼런스콜이 영상회의보다 딴짓하기 좋으며, 영상회의가 그나마 대면미팅보다 안전하다.
사실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것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내 표정 관리도 어렵고 상대에게 계속 집중하기도 지루하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잡티를 포토숍으로 감출 수도 없고, 자랑하고 싶은 장면만 편집해 내보낼 수도 없다. 못 알아들었다고 되돌려서 들을 수도 없고, 시간 없다고 재생 속도를 1.25배로 빨리 돌릴 수도 없다. 말실수를 해도 메시지 삭제가 안 되고, 다른 사람에게 한 말을 '복붙'(복사해서 붙여넣기)하기도 어렵다.
실제 세계에서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고 나를 드러낸다는 것은 맨 처음 자전거를 탈 때처럼 위험하고 조심스러운 일이다. 직접 타면서 방향 조절을 익히고 균형 감각을 체득하는 자전거 타기처럼 실습이 필요하다. 안해 버릇 하면 못하게 된다. 용불용설은 신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뇌도 마찬가지다. 뇌 신경 경로가 외부 자극의 경험·학습에 의해 재조직화되는 현상을 뇌신경 가소성이라고 한다. 뉴런 등 뇌세포가 어른이 되고 나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학습이나 환경에 따라 진화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한다. 영국 택시운전사의 해마가 그렇고 음악가의 측두엽이 그렇다. 사용하는 만큼 진화하고 묻혀 두는 만큼 퇴보한다.
요즘 우리 대화를 위한 신경회로망은 퇴화하고 있지 않을까 염려된다. 사과를 대신해 주는 서비스가 있는가 하면 사랑 고백이나 이별 통보를 대행하는 애플리케이션(앱)도 등장했다. 마주하는 대화가 두렵고 어려워서 대신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어폰을 끼고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기가 어렵고 휴대폰을 보고 있는 사람에게 깊은 얘기를 하기가 조심스럽다. 손가락은 빨라졌는데 마주하는 대화는 점점 줄어든다. 웬만하면 전화나 메신저로 간단히 핵심만 처리한다. 본문 없이 제목에 간단히 핵심만 보내는 '제곧내'가 이상하지 않다. '제목이 곧 내용'이라는 그 간단함조차 줄이고 또 줄였다. 점점 간단해지고 점점 압축한다. 만나서조차도 업무 이외 가벼운 대화 이상은 선을 넘지 않는다. 습자지처럼 얇게 빙빙 에둘러 스치다 헤어진다. 심각해지기 싫어하고 직면하기 불편해 한다. 각자 자기 세계를 존중한다는 미명 아래 각자 남의 세계에 관심이 없다.
대화는 호기심과 공감으로부터 시작하는데 그것을 발현할 시간도 투자하지 않고, 마음도 내지 않는다. 대화란 내가 어떤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대를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을 상대가 알 때까지 함께 머무는 것이다. 대화는 시간이 필요하고, 훈련이 필요하다. 또 그만큼 가치가 있다. 대화는 내면에 잠자고 있던 지성에 불을 붙이는 일이다. 대화를 하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야기가 확장되고, 의도하지 않은 생각이 정리된다. 내게 이런 생각이 있었나 하고 스스로도 놀라면서 말을 이어 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대화는 나조차 모르고 있던 내면을 끄집어내는 일이다. 이와 함께 대화는 타인과 연결되는 일이다. 서로의 세계 간 경계를 넘나드는 여행이다. 상대 경험에 무엇이 있고, 상대가 믿는 세계관은 무엇이며, 그것이 나랑 어떻게 다른지 알면서 내 세계관이 명확해진다. 상대가 무엇에 좌절하고 무엇에 힘을 회복하는지 들으면서 내 세계의 그것과도 만난다. 대화는 서로의 세계를 탐험하는 능동형 여행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유튜브에서 일방으로 주는 콘텐츠를 수동 입장에서 훑어보는 게 아니라 내가 방향을 잡을 수도 있고 내가 끌어낼 수도 있다. 내가 손전등을 켜고 감춰진 영역에 빛을 비출 수도 있다. SNS에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시간을 쏟고, 여행을 위해서는 1년 내내 모은 돈을 투자하면서 내 앞에 앉은 사람과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 '기생충'에 보면 “선을 넘는 사람을 내가 제일 싫어하는데… 냄새가 선을 넘지”라는 대사가 나온다. 요즘 우리는 선 넘기를 두려워하고 선을 넘어올까 봐 경계한다. 그러면서 점점 고립되고 외로워진다. 가족은 있는데 가족관계는 없고 친구는 많은데 친구관계는 없다. 형식상 눌러 주는 100명의 '좋아요'는 있는데 시간을 내 터놓고 무엇이 얼마나 왜 좋은지를 대화하는 진정한 감사는 사라지고 있다. 삶은 부딪치면서 깨지고, 그러다 깨닫는 경험의 장이다. 식당에 가서 메뉴만 보고 음식은 먹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세상을 살면서 눈으로 보는 것만 하기엔 삶이 너무 아깝다. 즐거움엔 고통이 동반한다. 어려움과 두려움 뒤에 그만큼 충만함과 기쁨이 숨어 있다. 상대를 훑어보고 구경만 하지 말고 진짜 상대와 만나 진짜 속을 나누자. 삶은 경험을 위한 특권이고, 대화를 경험하기 좋은 기회다.
글쓴이 : 지윤정 윌토피아 대표이사 toptmr@hanmail.net
출처 : http://www.etnews.com/20191018000125